검색어를 입력하세요.

12·12 군사반란, 반역의 시간표: 누구는 무너졌고 누구는 웃었다 - 아크로폴(ACROPOL)
  • Home
  • 말과사람
  • 12·12 군사반란, 반역의 시간표: 누구는 무너졌고 누구는 웃었다
12 12 군사반란

12·12 군사반란, 반역의 시간표: 누구는 무너졌고 누구는 웃었다

1979년 12·12 군사반란이 남긴 희생과 침묵의 기록.

12월 12일. 오늘은 대한민국의 운명이 송두리째 뒤집힌 날이다.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 일당은 군 지휘체계를 짓밟고 군부 내 사조직 하나회를 동원해 군사반란을 일으켰다.

2년 전 영화 서울의 봄이 개봉되며 이 사건이 다시 주목받았지만, 2시간짜리 영화에 이 거대한 반역의 배경과 후폭풍을 모두 담는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다.

전두환의 악행은 이미 널리 알려졌지만, 그 반란을 막으려다 인생이 처참히 무너진 사람들, 그리고 반란을 적극 지지해 가문의 영광을 얻은 자들의 명단은 여전히 희미하다.

오늘, 우리는 그 이름을 다시 불러야 한다.

누가 반란을 막으려 했는지 그 역사를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


반란을 막으려다 짓밟힌 사람들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정승화는 반란의 중심에 있던 전두환을 합동수사본부장에서 내쫓고 한직으로 밀어낼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국방장관 노재현은 이미 전두환에게서 뇌물을 받은 상태였고, 하나회는 군 핵심 요직을 장악한 상태였다.

결국 정승화는 서빙고로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불명예 제대된다.

심지어 10.26 사건과 김재규 공모 혐의까지 뒤집어쓰며 이등병으로 18계급 강등이라는 폭거를 당했다.

훗날 복권되었지만, 이미 그의 군 경력과 인생은 짓밟힌 뒤였다.

군을 확실하게 장악하지 못하고 전두환을 막지 못한 것이 두고두고 아쉽다.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

12·12 군사반란 당시, 반란군과 맞서 싸운 대표 인물이다.

그는 “반란군을 탱크로 밀어붙이자”고 외쳤던 지휘관이다.

반란군은 그를 끌고 가 조사했고, 결국 소장 신분으로 강제 예편했다.

가택 연금 6개월, 이후엔 아버지와 서울대에 다니던 아들까지 잃는 비극을 겪었다.

평소 정의롭고 강직했다고 알려진 인물. 하지만, 훗날 전두환 측 제안으로 공기업 사장을 맡은 점은 씁쓸한 여운을 남긴다.

정병주 특전사령관

장태완과 함께 끝까지 반란군에 맞선 인물. 그는 체포되어 강제 예편된 뒤, 1988년 실종됐고 1989년 한 부대 막사에서 의문의 죽음으로 발견됐다.

시계는 실종 당시 시점에서 멈춰 있었고, 장태완은 “정병주는 절대 자살할 사람이 아니다”라고 증언했다.

타살 의혹은 지금까지도 남아 있지만, 진상 규명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김진기 육군본부 헌병감

보안사에 끌려가 조사를 받고 준장 신분으로 자진 예편했다.

전두환‧노태우가 여러 차례 공직을 제안했지만 모두 거절하고 고향으로 내려가 농부·어부 생활을 한다.

그나마 김영삼 정부 들어서야 한국토지공사 이사장을 맡아 명예를 되찾는다.

안종훈 육군본부 군수참모부장

장태완이 “탱크로 밀어붙이자”고 했을 때 유일하게 찬성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전군 지휘관 회의에서는 군의 정치 개입을 반대한다고 공개 발언했고, 그 결과 강제 전역당했다.

이름조차 기억되지 않는 이들이지만, 이런 사람이 있었기에 군 전체가 완전히 썩지 않았던 것이다.

반란을 등에 업고 승승장구한 자들

안타깝지만 반란을 적극 반대한 사람들은 극소수였다.

물론 위에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적극적으로 반란에 반대한 군인들도 꽤 있었다.

하지만 이미 군 요직 대부분은 하나회가 장악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전두환 편에 붙어 반란에 참여한 자들은 이후 노태우 정권까지 황금길을 걸었다.

정부 고위직, 국회, 공공기관장과 각종 권력기관에 포진했다.

이 모든 곳에 하나회 출신들은 하나의 카르텔처럼 포진해 있었다.

이들은 김영삼 대통령의 ‘하나회 숙청’ 이전까지 대한민국을 사유화된 놀이터처럼 휘저으며 권력의 단맛을 마음껏 즐겼다.


진짜 문제: 전두환을 제지한 ‘민간 고위직’은 거의 없었다

군만 문제였던가? 아니다.

당시 고위 공무원들 대부분은 전두환의 폭주를 막지 않았다.

그들의 침묵과 방관이 군사반란을 성공으로 이끈 또 하나의 원인이었다.

특히 가장 한심한 인물은 당시 국방장관 노재현이다.

반란 당일, 그는 가족과 함께 미 8군 기지로 도망쳤다.

국방장관이 군사반란을 앞에 두고 도주한 것이다.

이런 사람이 국가안보를 책임지던 자리에 있었다는 사실이 대한민국의 비극이다.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 역시 군사반란을 제지하지 못했다.

그의 온건함, 무기력함, 우유부단함은 전두환에게 시간을 벌어주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12·12 군사반란의 비극은 2024년에 반복되었다

50년이 지난 2024년, 우리는 도저히 믿기 어려운 상황을 목격했다.

윤석열의 불법 비상계엄 시도가 드러났지만, 그 폭주를 온몸으로 막아선 고위급 공무원은 거의 없었다.

반세기가 지났는데도, 대한민국의 공직사회는 변하지 않았다.

위기 앞에서 책임을 회피하거나 침묵하는 공직자는 여전히 넘쳐났다.

이 반복되는 역사는 우연이 아니다. 우리가 이름을 기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2·12 군사반란 당시 대한민국을 구한 사람들, 망친 사람들

12·12는 단순한 과거사가 아니다.

이날은 국가가 얼마나 쉽게 무너질 수 있는지 보여준 날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몇몇 용기 있는 개인이 어떤 대가를 치르며 국가의 근간을 지키려 했는지를 보여준 날이기도 하다.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 반란을 막으려다 인생이 망가진 사람들
  • 반란을 방조하거나 적극 가담해 권력을 얻은 사람들
  • 침묵과 도주로 국가를 위기에 빠뜨린 고위 관료들

이름을 기억하는 것은 복수가 아니라 재발 방지다.

기억하지 않으면, 1979년의 악몽은 언제든 다시 찾아온다.

– 아크로폴

Releated Posts

바보들의 행진: 김문수의 찬가와 보수 몰락의 결정적 장면

한동훈을 보배라 부르는 김문수, 헌법을 지운 바보들의 행진곡 정치에는 명언이 많다. 하지만 가끔은 한마디 말이 한 정당의 수준을…

ByBymoduggagi 12월 19, 2025

탄핵 7년의 역설: 보수의 고름은 왜 터지지 않았는가?

박근혜 파면 후, 보수정당은 반성 대신 ‘내부 총질’과 ‘미봉책의 합당’을 택했다. 현재 진행형인 ‘보수의 고름’ 2017년 3월 10일:…

ByBymoduggagi 12월 18, 2025

김건희 리스크라는 블랙홀: 정권은 이렇게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무너졌다

김건희 리스크를 관리하지 않은 대가, 책임지지 않는 권력이 만든 정권 몰락 김건희 리스크라는 블랙홀 정권은 이렇게 조용히, 그러나…

ByBymoduggagi 12월 17, 2025

‘침묵형 재앙’ 박근혜 vs ‘확성기형 재앙’ 윤석열의 국정 농단

대한민국을 뒤흔든 ‘쌍둥이 실패작’의 극과 극 통치 스타일 비교. 권력 사유화의 패턴은 같았으나, 위기를 증폭시키는 방식은 정반대였다. 이…

ByBymoduggagi 12월 16, 2025

의견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