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키 스타디움 외야에 위치한 기념공원 (Monument Park)에 있는 빌리 마틴 (Billy Martin) 명판에는 “빌리보다 더 위대한 경쟁자는 없었다”라는 문구가 새겨져있음(There has never been a greater competitor than Billy).
마틴은 대단한 선수는 아니었지만 11년동안 열정적으로 뛰었고 양키스에서 4번의 월드시리즈 우승을 했음.
은퇴 후 여러 팀에서 감독을 했지만 특히 양키스에서 5번 선임/해임된 것으로 유명함.
오늘은 선수로서 감독으로서 치열하게 살다간 말썽쟁이 뉴욕 양키스 빌리 마틴 (Billy Martin)에 대해 알아보고자함.
불같은 성격! 뉴욕 양키스 빌리 마틴 (Billy Martin)의 파란만장했던 선수 시절
마틴은 1928년 캘리포니아 태생이며 1950년 데뷔해서 양키스의 내야수로 활약했음.
마틴은 1957년 캔사스시티로 트레이드 될때까지 4번의 월드시리즈 우승을 했는데 29번째 생일 파티도중 난동을 부린게 트레이드의 원인이었다고함.
1960년 신시내티에서 뛸 때에는 투수의 공이 몸 가까이로 날아오자 투수한테 배트를 던진 뒤 주먹으로 투수의 안면을 강타해서 광대뼈를 부러뜨린 적도 있었음.
현역시절 수많은 동료선수, 상대편 선수, 감독, 기자와 싸웠을 정도로 마틴의 불같은 성격은 유명했다고함.
5번의 선임/해임 시작: 뉴욕 양키스 빌리 마틴 (Billy Martin) 감독 1기
1969년 미네소타에서 첫 감독으로 데뷔를 했는데 팀을 아메리칸 리그 센트럴 디비전 우승을 시켰지만 소속팀 투수 보스웰과 술집에서 싸운게 알려져 해고가 되었음.
디트로이트, 텍사스 감독을 역임한 후 1975년 막바지에 양키스 감독으로 취임했는데 그의 술에 대한 의존도 및 통제 안되는 행동을 알고 있었던 양키스 수뇌부는 계약서에 품행 단속 조항을 넣었을 뿐만 아니라 코칭스태프도 직접 선정했다고함.
이런 제약에도 양키스의 조건을 받아들인건 마틴이 양키스로 얼마나 돌아가고 싶었는지를 보여준거였다고함.
스타인브레너와 레지 잭슨과의 불화: 뉴욕 양키스 빌리 마틴 (Billy Martin)의 고통스러웠던 1977년 우승
1976년에는 월드시리즈에 진출했으나 신시내티에 4연패을 당했는데 4차전에서 볼/스트라이크판정에 불만을 가지고 주심한테 대들었다가 퇴장당했음(양키스역사상 처음으로 월드시리즈에서 퇴장당한 경우라고함).
1977년에는 월드시리즈 우승을 해냈는데 구단주 스타인브레너와 새로 영입한 레지 잭슨 (Reggie Jackson)과의 불화로 인하여 힘든 시즌을 보내게됨.
개막전 후 첫 8경기에서 2승6패를 하자 불같은 성격의 스타인브레너는 팀의 분위기를 반전시키지 못하면 마틴을 해고하겠다고 공개적으로 망신을 줬다고함.
잭슨은 팀동료에게 존경받고있던 주장 서먼 먼슨 (Thurman Munson)이 아닌 자신이 팀을 이끌어가는 존재라고 말해 마틴과 선수들과의 관계를 악화시켰음.
술을 한번 마시기 시작하면 끝을 보는 습관이 있던 마틴은 스프링 트레이닝 기간 중 술을 끊었다가 시즌 개막후 스타인브레너의 간섭과 잭슨과의 불화로 스트레스를 받기 시작하자 다시 마시기 시작했다고 함.
그러나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마틴 감독은 팀을 추슬렀고, 마치 기적처럼 시즌 막판 50경기에서 40승을 따내는 놀라운 승률로 극적으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음.
이후 월드시리즈에서 다저스를 꺾은 후 우승을 차지하게됨.
1977년 우승이 마틴의 감독 생활 중 유일한 우승이었는데 매우 고통스러운 우승이었다고함.
마쉬멜로 싸움과 영원한 애증: 뉴욕 양키스 빌리 마틴 (Billy Martin)의 경질과 재선임 반복
1978년에는 팀이 부진하자 눈물을 보이면서 감독직을 사임한 마틴은 1979년 다시 감독으로 복귀했으나 미네소타호텔에서 마쉬멜로 판매원과 싸움을 하는 등 마틴의 성질은 그대로였음.
그날 싸운 이유는 상대가 마틴이 올해의 감독상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말에 화가 난 마틴이 500달러를 걸고 한판 붙자고 도발했다고 하는데 결국 이 일로 MLB 사무국이 양키스에 압력을 넣어서 2번째로 해임되었음.
오클랜드 감독으로 취임한 마틴은 도루왕 리키 핸더슨 (Ricky Henderson)을 키우고 팀성적을 개선했으나 술에 대한 의존도 및 원정경기에 여자를 데리고 다니다가 해임되었음.
이후 양키스 감독으로 3번 선임/해임되었는데 이 기간중 싸우면서 정들었는지 스타인브레너는 마틴을 항상 곁에 두면서 팀 성적이 부진하면 구원감독으로 마틴을 투입했었다고함.
스타인브레너는 마틴의 망나니 짓에는 치를 떨었지만 어드바이저, 해설위원 등으로 옆에 두면서 당시 감독들이 받던 연봉보다 많은 30만달러를 지급하면서 마틴을 챙겨줬다고함.
영구결번 등번호 1번! 뉴욕 양키스 빌리 마틴 (Billy Martin)의 마지막과 전설
마틴은 선수 생활 중 6번, 감독 생활 중 48번 퇴장을 당했는데 한번 퇴장 당할 때마다 격렬한 언쟁 후 심판한테 흙을 차거나 던지는 것으로 유명했음.
마틴은 1989년 크리스마스날 술에 취한 친구가 몰던 차에 탑승했다가 교통사고로 사망함으로서 짧고 굵었던 인생을 마감하게됨 (물론 마틴도 만취상태였음)
마틴의 양키스 등번호 1번은 1986년 영구결번 되었고 그의 흉상은 양키스 타디움 외야에 있는 기념 공원에 전시되어 있는데 마틴은 기념식날 다음과 같은 명언을 남겼음.
“내가 양키스 유니폼을 입었던 선수 중 가장 위대한 선수는 아니었을지몰라도 가장 자랑스러운 선수라고는 생각합니다”.
뉴욕 양키스 빌리 마틴 (Billy Martin)은 나이가 들어서도 철이 안들었지만 야구에는 진심이었고 양키스 유니폼을 입었을때 가장 행복해했던 뼛속까지 양키였던 레전드로 남게됨. Bye~
– 아크로폴
뉴욕 양키스의 ‘철인’ 루 게릭 – 불멸의 기록들 루 게릭(Lou Gehrig)은 17년 동안 뉴욕 양키스의 1루수로 뛰면서 (1923년~1939년) 6번의 월드시리즈 우승, 7번의 올스타, 2번의 AL…
메이저리그를 대표하는 최고의 명문 구단이 뉴욕 양키즈와 LA 다저스라는 데는 이의가 없을 거라고 봄. 각기 동부와 서부를 대표하는 구단이고, 아메리칸 리그와 내셔널 리그를 대표하는 양키즈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