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 6년 동안 메이저리그를 씹어먹고 사라진 샌디 코팩스
로저 클레멘스(Roger Clemens)는 통산 354승을 거뒀지만 스테로이드 사용으로 명예의 전당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음.
토미 존(Tommy John)은 통산 288승을 스테로이드의 도움 없이 거뒀지만 명예의 전당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음.
오늘 알아보고자 하는 샌디 코팩스(Sandy Koufax)는 통산 165승밖에 거두지 못했지만 명예의 전당에 들어가 있음.
샌디 코팩스는 어떤 투수였길래 명예의 전당 자격요건을 갖춘 첫해인 1972년에 야구기자협회(BBWAA) 투표에서 86.9%의 득표율로 헌액되었는지 알아보고자 함.
샌디 코팩스는 1935년 뉴욕 브루클린(Brooklyn)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났음.
그의 원래 이름은 샌포드 브라운(Sanford Braun)이었는데 샌디가 3살 때 부모가 이혼하는 바람에 외할머니에 의해 양육되었음.
샌디가 9살 때 그의 어머니가 어빙 코팩스(Irving Koufax)와 재혼하면서 그의 성이 코팩스로 바뀌었다고 함.
신시내티 대학에 진학해서 야구와 농구를 병행하던 샌디는 뉴욕 자이언츠(New York Giants)와 트라이아웃 기회를 가지게 되었는데 긴장한 샌디는 포수 머리 위로 공을 던졌고 기회를 날렸다고 함.
하지만 샌디에 대한 소문은 계속 퍼져나갔고 여러 팀이 샌디를 영입하려고 달려들었지만 결국은 브루클린 다저스(Brooklyn Dodgers)가 2만 달러에 영입에 성공함.
당시 다저스의 스카우트였던 알 캄파니스(Al Campanis)는 다음과 같이 얘기했다고 함.
“내 인생에서 소름이 돋았던 순간은 두 번 있었다. 첫 번째는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을 봤을 때이고, 두 번째는 샌디 코팩스가 강속구를 던지는 것을 봤을 때다.”
다저스 초창기의 샌디 코팩스
샌디는 마이너리그에서 뛴 경력이 아예 없었는데 기본기가 매우 부실했던 그가 바로 메이저리그에서 선수생활을 한 이유는 4000달러를 초과하는 계약금을 받으면 해당 선수를 25인 로스터에 2시즌 동안 유지해야 한다는 당시 규칙 때문이었다고 함.
1955년 다저스는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했지만 샌디는 한 경기도 뛰지 못했고 1956년에도 제구력의 문제로 인하여 강판당하는 일이 많았음.
당시 샌디의 재능을 알고 있었던 팀 동료 재키 로빈슨(Jackie Robinson)과 로이 캄파넬라(Roy Campanella)가 샌디를 몇 주씩 벤치에만 앉혀놓는 감독과 갈등을 빚었다고 함.
다저스의 일부 백인 선수들은 유태인이었던 샌디를 따돌렸고 그를 지칭할 때 반유대주의적인 욕설을 사용했다는데 오히려 팀 내 흑인 동료들이 샌디를 옹호해줬다고 함.
1957~1960년 시즌에도 정기적인 기회를 얻지는 못했고 잘 던지는 날에는 경기당 삼진을 16개, 17개, 18개까지 잡았지만 폭투도 많이 던져서 여전히 제구력에 문제가 많았음.
1960년에는 자신을 트레이드해달라고까지 요청했으나 다저스가 거부했고 화가 난 샌디는 자신의 장비를 쓰레기통에 던지고 은퇴를 결심했었다고 함.
샌디는 첫 6시즌 동안 36승 40패 방어율 4.10을 기록했음.
샌디 코팩스의 르네상스 시기 도래
은퇴 결심을 번복한 샌디는 1961년 스프링캠프에서 다저스 스카우트 케니 마이어스(Kenny Myers)의 도움으로 투구폼을 교정하기 시작했음.
마이어스는 샌디가 와인드업 시 그가 너무 뒤로 젖혀 제구력이 흔들리는 경향이 있다는 걸 관찰했고 이를 받아들인 샌디는 투구 메커니즘 전반을 다듬었음.
1961년 기회를 얻기 시작한 샌디는 18승 13패를 기록했고 처음으로 30게임 이상 선발(35번의 선발) 및 200이닝 이상(255이닝 소화)을 소화하면서 269개의 삼진을 잡아냈음.
1961년부터 1966년까지 샌디가 보여준 활약은 역대급이라 할 수 있음. 이 기간 동안 샌디의 기록은 다음과 같음.
| 연도 | 승패 | 방어율 | 삼진 |
| 1961년 | 18승 13패 | 3.52 | 269개 |
| 1962년 | 14승 7패 | 2.54 | 216개 |
| 1963년 | 25승 5패 | 1.88 | 306개 |
| 1964년 | 19승 5패 | 1.74 | 223개 |
| 1965년 | 26승 8패 | 2.04 | 382개 |
| 1966년 | 27승 9패 | 1.73 | 317개 |
전성기에 사라진 샌디 코팩스
샌디는 1963년, 1965년, 1966년에 사이영상을 수상했는데 3년 전부 투수 부문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했음.
그럼 1967년에는 어떤 성과를 냈을지 궁금할 텐데 애석하게도 샌디는 1966년을 끝으로 메이저리그 무대에서 영원히 사라짐.
샌디는 1965년 3월 완투 경기를 치른 다음 날 아침에 왼쪽 팔 전체가 출혈로 인해 붓고 멍이 든 것을 발견했음.
LA로 돌아와 의사와 상담했고 계속 투구를 하면 팔을 사용할 수 없게 될 거라는 경고를 들음.
그 후로 매 경기 전, 샌디는 캡사이신 성분이 함유된 캡솔린 연고를 어깨와 팔에 발랐고 붓기를 막기 위해 얼음물에 팔을 장시간 담그기 시작했음.
필요할 경우에는 팔꿈치 관절에 코르티손 주사를 맞기도 했는데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만성 팔꿈치 관절염은 호전되지 않았음.
결국 1966년 11월 18일 은퇴를 선언하게 되는데 그는 기자회견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음.
“야구 선수 생활이 끝난 후에도 살아갈 날들이 많이 남아 있고, 그 시간들을 온전히 제 몸을 활용하며 보내고 싶습니다. 지난 12년 동안 단 한 순간도 후회하지 않지만, 단 한 해라도 너무 길게 느껴졌다면 후회했을 것 같습니다.”
30세의 나이에 아쉽게 끝나버린 샌디 코팩스의 야구 인생으로 인하여 그가 명예의 전당에 입성할 자격이 있냐는 비난도 있었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의 자격은 충분하다고 그를 옹호함.
샌디의 6년 전성기 동안의 눈부신 활약으로 인하여 그는 야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투수 중 한 명으로 자리매김했고 그는 36세의 젊은 나이에 명예의 전당에 입성함으로 역사상 최연소 입성자가 되었음.
하지만 여전히 토미 존(Tommy John)처럼 오랜 기간 동안 꾸준히 활약하면서 288승을 거둔 선수는 명예의 전당에 들어가지 못하는데, 고작 6년 동안의 활약으로 샌디가 입성하는 게 맞느냐는 비난이 있는 것도 사실임.
그런데 당시 그를 뽑은 기자들은 당신이 샌디가 실제로 던지는 모습을 직접 봤다면 그를 뽑지 않을 수 없었을 거라고 입을 모아 얘기함.
아무튼 아쉽게 끝난 선수 생활이지만 워낙 강렬한 임팩트를 남긴 덕분에 샌디 코팩스(Sandy Koufax)는 지금까지도 역대 최고의 좌완 중 한 명으로 평가받고 있음.
밝아오는 2026년 새해에 다시 만나자고. Bye~
– 아크로폴
로베르토 클레멘테 (Roberto Clemente): 라티노선수 최초 명예의전당 입성
그리고 로베르토 클레멘테의 비극적인 스토리 로베르토 클레멘테 (Roberto Clemente)는 1934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