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5일마다 메이저리그 모든 선수가 42번을 입는 이유
매년 4월 15일은 재키 로빈슨 데이(Jackie Robinson Day)로 지정되어 있는데, 이날은 영구결번된 로빈슨의 유니폼 번호인 42번이 새겨진 유니폼을 모든 MLB 선수와 코칭스태프가 입을 수 있는 유일한 날임.
오늘은 흑인 최초로 근대사 MLB에서 처음으로 뛴 재키 로빈슨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함.
재키 로빈슨, 갱단 멤버에서 UCLA의 전설적인 4종목 선수로
재키 로빈슨은 1919년 조지아주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가족은 소작농이었음.
1920년 그의 부친이 가족을 떠나자 캘리포니아로 이주하게 되었는데 그의 어머니는 여러 일을 하면서 가족을 부양했음.
어린 로빈슨은 한때 갱에 들어가기도 했는데 그의 친구의 설득으로 갱에서 나왔다고 함.
운동에 재능을 보였던 로빈슨은 야구, 농구, 미식축구, 육상선수로 뛰었는데 2년제 대학을 거친 후 UCLA 대학에 진학하게 됨.
당시 UCLA 미식축구팀에는 단 4명의 흑인 선수가 소속되어 있었는데, 그나마 UCLA 미식축구팀이 흑인 선수가 가장 많은 대학 중 하나였을 정도로 흑인 선수한테는 문호가 닫혀있던 시대였음.
군대 내 인종차별에 맞서 싸운 재키 로빈슨의 강인함
제2차 세계대전에 미국이 개전한 후 로빈슨은 1942년 징집되었고 육군기병부대에 배치되었음.
로빈슨은 장교로 복무하고자 다른 흑인 병사들과 같이 장교후보생학교(OCS)에 입학을 신청하였는데 아무 이유 없이 수개월 동안 입학이 지연되었음.
하지만 헤비급 복싱 챔피언 조 루이스(Joe Louis) 등의 항의로 인하여 흑인 병사들은 OCS에 입학하게 되었고 로빈슨은 1943년 소위로 임관하게 되었음.
로빈슨은 장교로 임관은 했지만 군에서 인종차별을 겪게 되었음.
동료 장교의 백인 아내와 육군 버스에 탑승한 후 뒤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거부한 로빈슨을 체포한 후 군사재판에까지 회부하였지만 로빈슨은 이에 맞서 싸웠고 결국에는 무죄 판결을 받게 됨.
당시 미 육군은 인종차별 없는 버스 편을 운영했지만 흑인을 대상으로 한 말도 안 되는 인종차별은 엄연히 존재한 시대였음.
브랜치 리키와의 운명적 만남, 재키 로빈슨 다저스 입단
제대 후 다시 미식축구 선수로도 뛰었지만 1945년 캔자스시티 소재 니그로 리그(Negro League) 야구팀으로부터 제안을 받고 야구선수로 뛰게 됨.
로빈슨은 47경기를 뛰면서 타율 .387을 기록했지만 니그로 리그의 엉망인 운영과 도박에 대한 관용에 환멸을 느끼게 됨.
같은 해 보스턴 레드삭스(Boston Red Sox)에서 흑인 선수들을 상대로 한 트라이아웃에 참여했지만 인종차별적인 욕설을 듣고 트라이아웃을 포기하게 됨.
다행스럽게 브루클린 다저스(Brooklyn Dodgers)의 구단주이자 단장인 브랜치 리키(Branch Rickey)가 니그로 리그의 선수 중 유망한 흑인 선수 명단에서 로빈슨을 선택하였고 월 600달러에 계약을 맺게 됨.
역경을 뚫고 메이저리그 신인왕이 된 재키 로빈슨
바로 마이너리그에서 뛰게 되었는데 인종차별이 심했던 플로리다에서는 팀 호텔에서 백인 동료들과 함께 묵을 수 없었고 어떤 감독은 로빈슨을 자신의 팀에 두지 않겠다고까지 할 정도로 인종차별은 심했음.
이러한 차별을 잘 견뎌낸 로빈슨은 1947년 다저스 시즌 개막 6일 전에 메이저리그 팀에 합류할 수 있었고 등번호 42번 유니폼을 입고 데뷔하게 됨.
하지만 일부 팀 동료는 로빈슨과 같이 뛸 수 없다고 반발했지만 당시 감독이었던 리오 듀로처(Leo Durocher)의 다음과 같은 강력한 한마디로 사태가 종결됨.
“그 선수가 노란색이든 검은색이든, 아니면 빌어먹을 얼룩말처럼 줄무늬가 있든 말든 상관없어. 난 이 팀의 감독이고, 내가 뛰라고 하는 선수면 뛰는 거야. 게다가 그 선수가 우리 모두를 부자로 만들어 줄 수도 있어. 만약 너희 중에 돈이 필요 없는 사람이 있다면, 내가 전부 트레이드해 버릴 거야.”
로빈슨은 상대 팀의 거친 플레이의 표적이 되곤 했고 이로 인하여 다리에 약 18cm의 부상을 입기도 함.
또한 타 팀 감독이 로빈슨을 상대로 깜둥이라고 부르며 목화밭으로 돌아가라는 욕설을 퍼붓기도 함.
하지만 로빈슨을 받아들이고 그의 편이 되어준 선수도 많았기에 로빈슨은 선수생활을 계속할 수 있었음.
로빈슨은 MLB 첫해에 151경기에 출전했고 타율 .297, 31개의 2루타, 12개의 홈런, 29개의 도루를 기록했고 신인왕 초대 수상자로 뽑히게 되었음.
그의 활약에 힘입어 다저스는 NL 챔피언에 오른 후 양키스와 대결했지만 7차전에서 패하게 됨.
재키 로빈슨이 허문 인종 장벽과 위대한 유산
로빈슨에 대한 인종차별은 2~3년 거치면서 서서히 수그러들었고 다른 흑인 선수들이 MLB에 진출하게 됨.
로빈슨은 1956년까지 선수로 뛰면서 월드시리즈 우승도 했고 MVP 상도 받게 됨.
로빈슨은 통산 타율 .313, 출루율 .410, 141개의 홈런을 기록하게 됨.
총 6번 월드시리즈에 진출해서 양키스와 대결했는데 1번의 우승만 기록하게 됨.
로빈슨은 1947년 4월 15일 MLB의 인종장벽을 허물었고 60년 넘게 이어져온 니그로 리그에 종지부를 찍은 인물로 기록됨.
선구자 로빈슨의 용기, 침착함, 그리고 엄청난 재능으로 인하여 MLB에서 인종 통합을 가져왔고 사회 변화를 촉진하며 미국 사회가 하나되는 데 기여함.
로빈슨은 오랜 기간 뛰지는 못했고 그의 기록이 대단하다고 볼 수는 없지만 그의 외로운 싸움은 오늘날까지 높이 평가받고 있음. Bye~
– 아크로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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