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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당정치의 폐해③] 공천권을 내려놓지 않는 정당은 민주주의를 말할 자격이 없다 - 아크로폴(ACROP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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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역을 방문한 이준석 당시 국민의힘 대표와 당 인사들

[정당정치의 폐해③] 공천권을 내려놓지 않는 정당은 민주주의를 말할 자격이 없다

대한민국 정치가 좀처럼 바뀌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정치인 개인의 무능 때문만은 아니다.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정당이 국회의원에게 쥐여주는 공천권이라는 생사여탈권이다.

국회의원에게 가장 무서운 존재가 국민이 아니라 당권파가 되는 순간, 민주주의는 껍데기만 남는다. 지역구 유권자의 평가보다 계파 보스의 눈치를 보고, 국익보다 당권파의 심기를 살피며, 소신보다 충성을 선택하는 정치인이 양산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결국 대한민국 정치는 아직도 공천이라는 봉건적 지배 구조에서 전혀 벗어나지 못했다.

국회의원이 왜 국민보다 보스를 두려워하는가

국회의원은 헌법적으로 국민의 대표다.

그러나 현실은 어떤가.

정계 입문부터 공천까지 결정하는 핵심 자원이 유권자의 평가가 아니라 정당 내부의 권력이라는 사실을 부정하기 어렵다. 의원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다음 선거에서 국민에게 선택 받을 수 있는가”만이 아니다.

“당권파의 눈 밖에 나지 않았는가”가 더 중요해지는 순간이 반복된다.

그러니 의원들은 소신 발언을 두려워한다.

당 지도부와 다른 목소리를 내면 ‘배신자’라는 낙인이 찍히고, 계파의 이해관계에 반하면 공천에서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는 공포가 작동한다. 그렇게 국회의원은 국민에게 책임지는 정치인이 아니라 당권파의 눈치를 보는 정치인으로 변질된다.

이것이 바로 공천 피라미드 정치다.

맨 위에는 공천권을 쥔 보스가 있고, 그 아래에는 공천을 받아 국회에 입성한 의원들이 줄을 선다. 그리고 의원들은 다시 지역에서 표를 모아 자신의 정치적 생존을 증명한다.

이 구조에서 유권자는 주인이 아니라 사실상 표를 공급하는 존재로 전락한다.

경상북도 안동 고산서원 전경
경상북도 안동 고산서원. 신분과 위계가 지배했던 조선의 질서를 보여준다.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즈 (CC BY 3.0)

보스는 영주, 국회의원은 마름이 된다

이 구조를 가장 적나라하게 표현하면 봉건제와 닮았다.

공천권을 쥔 계파 보스는 대지주나 영주가 된다. 공천을 받은 국회의원은 자신에게 배정된 지역구를 관리하는 마름이 된다.

마름에게 중요한 것은 소작농의 삶이 아니라 지주에게 바칠 충성이다.

현대 민주주의에서 이런 비유가 등장한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하지만 현실 정치에서는 계파에 대한 충성, 당권파에 대한 복종, 보스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대한 동조가 공천의 중요한 기준처럼 작동해왔다.

“국민이 나를 뽑아줄까?”보다 “보스가 나를 공천해줄까?”가 더 중요한 정치야말로 한국 정치의 가장 치명적인 병폐다.

사적 충성의 대가로 공천권을 지급하는 구조에서는 현대적인 정당이 만들어질 수 없다. 정책과 철학을 중심으로 경쟁하는 정당이 아니라, 보호와 충성을 주고받는 정치적 사조직으로 변질될 뿐이다.

보수도 진보도 공천의 족쇄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이 문제는 어느 한 정당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보수 정당에서는 이명박·박근혜 정부 시절부터 공천 파동이 반복됐다. ‘진박’ 논란이 등장했고, 2016년 총선에서는 이른바 ‘옥새 들고 나르샤’라는 말까지 등장했다.

공천권을 둘러싼 당내 권력투쟁이 선거보다 더 뜨거웠던 것이다.

윤석열 정권 시절에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친윤 중심의 당권 경쟁이 벌어지면서 권력의 입김에 따라 당내 룰과 인적 구도가 흔들렸다.

소신을 밝히는 의원은 당내에서 고립됐고, 당권파와 다른 목소리는 ‘배신’으로 공격받기 일쑤였다.

결국 정당 내부의 다양성과 합리적 보수의 목소리가 설 자리는 좁아졌다.

정당의 외연을 넓혀야 할 정치가 오히려 자기편만 챙기는 수성정치로 변질된 것이다.

진보 진영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친노에서 친문으로, 다시 친명으로 이어지는 당내 권력 재편 과정에서도 공천을 둘러싼 논란은 반복됐다. ‘시스템 공천’이라는 주장을 했지만, 제도가 실제 정치 현장에서 어떻게 적용되는가를 놓고 끊임없이 논란이 발생했다.

최근 민주당 당대표 선거도 결국에는 공천권이라는 이권을 잡기 위한 과정에 불과하다.

정책적 이견이나 지도부에 대한 비판이 때로는 당의 정체성이나 적통성에 대한 도전으로 해석되기도 했다.

결국 문제의 핵심은 진보냐 보수냐가 아니다.

권력을 가진 계파가 공천권을 독점할 때 어느 정당에서든 똑같은 병이 생긴다.

더불어민주당 당대표 출마 기자회견에 나선 이재명
2024년 7월 더불어민주당 당대표 출마를 선언하는 이재명.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즈 (CC BY 3.0)

‘시스템 공천’이라는 이름만 바꾼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정당은 언제나 공정한 공천 시스템을 만들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름이 아니다.

진짜 중요한 것은 누가 최종적으로 사람을 선택하느냐다.

아무리 복잡한 심사 기준과 점수표를 만들어도 최종 결정권이 당이나 당권파의 영향력 아래 있다면 시스템은 언제든 권력의 도구가 된다.

민주주의는 절차의 외형만 갖춘다고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공천 과정이 투명하고 예측 가능해야 하며, 당내 다양한 의견이 실제로 경쟁할 수 있어야 한다. 지도부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불이익을 받고, 특정 계파에 속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공천 경쟁에서 밀려난다면 그것은 민주적 정당이 아니다.

보스에게 충성하는 정치인을 뽑는 것은 정당의 자유가 아니다. 그것은 정치적 사유화다.

공천권을 국민과 당원에게 돌려줘야 한다

대한민국 정치가 바뀌려면 결국 공천 구조부터 바꿔야 한다.

공천권이 당권파와 계파 보스의 손에 남아 있는 한 아무리 개혁적인 인물이 정치권에 들어와도 오래 버티기 어렵다.

처음에는 개혁을 외치던 정치인도 다음 공천을 걱정하기 시작하면 결국 당권파의 눈치를 보게 된다.

그래서 필요한 것은 단순한 인물 교체가 아니다. 공천 시스템 자체를 바꾸는 정치개혁이다.

공천 과정의 투명성을 강화하고, 당원과 유권자의 실질적인 선택권을 확대하며, 지도부가 공천을 이용해 정치적 반대자를 제거하는 구조를 차단해야 한다.

공천권을 당권파의 사적 권력에서 떼어내 당원과 유권자가 실질적으로 행사하는 상향식 구조로 바꾸지 않는다면, 대한민국 국회의원의 ‘마름화’는 계속될 것이다.

1948년 투표함 앞에서 투표용지를 넣는 유권자
1948년 내촌에서 투표하는 유권자.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즈 (Public domain)

국민의 대표를 다시 국민에게 돌려줘라

국회의원은 계파 보스가 임명하는 사람이 아니다. 국민이 뽑는 사람이다.

그런데 공천 단계에서부터 정치인의 생사여탈권을 당권파가 틀어쥐고 있다면 선거는 절반짜리 민주주의에 불과하다.

국민은 투표용지에서 후보자를 선택하지만, 그 후보자를 선택할 기회 자체를 정당 보스가 먼저 결정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정치가 진정한 민주주의로 나아가려면 답은 너무나 분명하다.

국회의원은 보스의 사람이 아니라 국민의 사람이어야 한다.

정당은 계파의 사유물이 아니라 당원과 국민을 위한 공적 조직이어야 한다.

공천권이라는 낡아 빠진 생사여탈권을 내려놓지 않는 정당이 아무리 민주주의를 외쳐도 국민에게는 공허한 구호일 뿐이다.

보스에게 충성하는 국회의원을 만드는 정당은 민주주의 정당이 아니다.

이제 대한민국 정치가 끊어야 할 것은 계파의 충성 서약이고, 무너뜨려야 할 것은 공천 피라미드다.

그래야 비로소 국회의원이 보스의 마름에서 벗어나 국민의 대표로 돌아올 수 있다.

– 아크로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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